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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임 분산 시스템.
1. 개념
"개념이 있다."(혹은 "개념이 없다.") 앞에 숨은 단어는 '기본'인 것 같다. 그 더 앞에 숨은 단어는 "보편적으로 호환되는"인 것 같고, 그 더 앞에 숨은 단어는 아마도 "내가 가진 것과 유사한"? 개념이, 상식이, 싸가지가 없는 인간은 없을 것 같은데. 다만 나와 다른 개념을, 상식을, 싸가지(적용 기준)를 탑재하고 있을 뿐이지. 흐음. 2. 전자책 2015년까지 글자로만 된 모든 종이책 교과서를 전자책으로 바꾼다는 방침을 들었다. 기쁘네. 그럼 이제 그 전자책 단말기로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만화나 소설이나 영화, 게임(그래도 오목 수준의 프로그램은 돌아가겠지?안 돌아가면 기본 기능들 조합해서 뭐라도 게임처럼 만들 수 있을 듯.;;) 즐기는 아이들이 나오겠지.ㅋㅋ.(처음엔 소설일 것이다. 그게 가장 쉽고 빠르고 싸니까.) 전자책 잡담에서의 기대가 점차 실현되는 것 같아 즐거움. 이제 해외 장르소설 전자책 발간 붐(붐? 그전에 망하겠다.;;)까진 한 걸음 남았구나. 아, 그전에 먼저 해외 저작권 계약-번역-출판(물론 전자책만) 단계까지 혼자 해치우는(번역 부분은 하청 줘서라도.) 슈퍼(라고 쓰고 반칙성이라고 읽는다.) 에이전시들이 등장하겠지만. 음, 그걸 좀 중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에이전시들이 아니라) 나와 취향이 맞는 역자들 중에 이걸(혼자선 힘들면 에이전시와 페어를 이뤄서.) 시도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다. 어차피 그 한계는 뚜렷하지만 장점도 뚜렷하다. (철저히 자립적인 재정 기반의 소규모출판 중심.) 3. 매체 혼용 2번 관련된 이야기 듣다가. 개인적인 경험칙상, 내게 기왕에 불특정다수에게 전달할 내용이 있다면, 하나의 매체에만 의존하기보다 여러 매체들을 다양하게 혼용해 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면, 순수하게 문자로만 된 보고서보다는, 관련 삽화, 도표, 수식, 사진, 소리, 영상, 아이콘, 보디랭귀지들을 보조(혹은 주)도구로 적재적소에 섞어넣을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이 더 큰 선택의 폭을 가질 수 있었고, 더 큰 전달력을 가질 수 있었다. 타겟 수용자층도 더 넓힐 수 있고.(세상엔 문맹도 있다.) 아니, 애초에 과외 등 개인교습의 전달력 우위(혹은 선호)가 그렇게 시작된 것 아냐? 따라서 오히려 질문을 반대 방향으로 하고 싶은데, 매체 혼용하면 왜 안 돼? 다양한 매체를 얼마든지 골라 쓸 수 있는 현대에 살면서도 오직 고전적 문자 매체만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필연성을 되려 답해야하지 않을까? (아직은 대세니까 대답 궁리할 필요 없다?-_-) 흠, 물론 그러면 "내용만이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전달 방식 자체가 소통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고 답하겠지. 문자 매체는 아직도 가장 방대한 자료량을 자랑하는 전통적 매체고, 따라서 학생들은 그 데이터 베이스를 써먹기 위해 문자 매체 자체를 학습해야한다든지. 그 중에선 문장 자체의 아름다움을 갈고 닦는 문필가도 나올 수 있고. 무슨 이유든 상관 없다. 다만 자신의 이유를 댈 수 있으면 좋겠다. 음, 예전에 "라이트노벨은 만화를 그리지 못하는 만화가들의 만화"라는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일부만이라도 사실이라면 꽤 슬픈 일이다. 생각한 걸 구현할 매체가 글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글로 쓰는 작가라니, 해당 장르와, 독자와, 출판사와,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4. 쿼드코어의 효용 샌디(2500k)를 산 뒤 도통 업글 체감을 못했다. 근데 최근 미드 몇 개를 휴대전화에서 보려고 재인코딩을 시도해봤더니 훌라! 체감상 거의 3배쯤 빨라졌다. 하지만 내 성격상 그 전자동 재인코딩 작업조차 귀찮아(인코딩 프로그램에 파일들 드래깅만 하면 끝인데.;;) 안 써먹을 듯. 그래도 32기가 sd카드는 잽싸게 주문해놨다는 점이 또 반전. 5. 책 버리기 2차로 50권쯤 더 버림. 이제 버린 책이 200권에 가까워진다. 내 오랜 책들이 사라지니 홀가분하고 좋구나. 문제에 접근할 때 소거법은 언제나 쉽고 가볍고 상쾌하고 청결하고 아름답고 논리적인 해법처럼 보인다. "악당들이 모두 사라지면 세상은 다시 선해질 거야."는 순박한 믿음처럼. 흡사 파시즘처럼. 혹은 홈즈의 추리 방법론처럼. 그러나 "완벽은 더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뺄 것이 없는 상태다."를 문장에 적용시키기와 사람에 적용시키기는 좀 다른 듯하다. 어떤 문제는 소거될 수 없다. 어떤 질병은 외과적 접근(수술)로 병인을 단박에 적출해 배제시키기보다, 그냥 내과적 접근(약물과 식이요법 등)으로 관리하며 평생 함께 사는 쪽이 더 합리적 접근일 수도 있다. (이분법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엔 내외과 요법 병행이 가장 효과적이겠지.) 지금 당장 살아가기 위해선 언젠간 반드시 찾아올 죽음을 인지하면서도 그걸 감내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치명적이지만 삶에서 '소거'할 수 없다. 애초에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출신 지역이나 성적 기호나 죽음이 '문제'였던가? 그건 오히려 초기 형성 조건에 가깝다. 그 '조건'들은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도자기는 언젠간 깨지기 때문에, 찰나의 물건이기에 더 아름다운 거다."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영리하다. '깨짐'은 도자기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이고,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라고. 이게 죽음에 대한 소위 "긍정적 사고"일 것이다.(종말물도 이렇게 좀 써봐라.) 그러니까, 책 버리니 의외로 홀가분하고 좋아서, 버릇들까봐 그만 버리기로 했다는 소리. 그리고 열역학 법칙들이 인문학도들 입맛에 안 맞아도("너무 반인본주의적이야!"? 당연하지. 우주의 인간소외는 문제가 아니라 조건이다. 사실, "인간소외 극복"따위를 부르짖지 않아서 SF를 한 때 좋아했던 건데.-_-) 그냥 감내하는 편이 좋겠다는 소리. 엔트로피는 인간의 희망대로 역전, 재역전되지 않는다. 그게 반인본주의적 상황이든 인본주의적 상황이든. 인간이 사랑으로 진공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좋지만, 그 로망을 진짜라고 착각하고 진공 속으로 사랑만 가지고 뛰어들면 그 사람은 대개 금세 죽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럴 때, '문제'는 진공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1. 청소.
새해맞이 대청소를 했다. 내 대청소는 언제나 정리보다는 버리기 위주. 평소부터 물건 내다버리길 좋아해서 시나브로 쌓인 택배용 박스들 외에는 딱히 버릴 만한 것들이 없었다. 다만 같은 이유로, 일단 어떤 이유로 장기보유한 물건은(내다버리기 기준 심사에서 살아남은 물건은) 20년도 넘게 가지고 있는 일이 흔하다. 우정국 창립 100년 기념(1984년) 세계우표전시대회에서 극소수량만 한정판매한 자라든지. 그래서 이번엔 그런 것들 위주로 갖다버림. 2. 복합기. 1번. 오래된 잉크젯 프린터를 버리고 대신 복합기를 하나 주문했다. 잉크 카트리지 2개 값이면 레이저 프린터+ 스캐너+복사기 기능의 신형을 사는구나. 헐. 3. 장르의 로망. 난 "SF 가지고 과학하기"따위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SF 장르에서 과학적 엄밀성 같은 것에 죽어라 매달리는 일에 거부감을 품지 않고, 오히려 그러는 것을 꽤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SF 가지고 과학하기는 불가능하다." 혹은 "SF는 과학이 아니다.", "SF는 과학엔 별 쓸모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한 후에야 건강하게 추구할 수 있는 로망이라고 본다. 현대의 격투기가 실전성(혹은 전통)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은 역으로 현대의 격투기가 실전성(혹은 전통)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리얼리즘 장르 소설 계열이 리얼리즘에 집착하고, 탐정 장르 소설 계열이 추리에 집착하고, 판타지 장르 소설 계열이 환상성에 집착하듯이. 그러나 리얼리즘 장르 소설은 리얼하지 않고 탐정 장르 소설은 추리적이지 않고 판타지 장르 소설은 환상적이지 않다. 탐정 소설에 나오는 탐정이나 밀실 살인, 알리바이 조작, "범인은 이 안에 있다." 같은 전제나 도구,방법론 같은 것들은 현실은 물론 해당 장르 안에서조차 대갠 실패한 농담일 뿐이다. 읽는 독자도 쓰는 작가도 그것을 알지만, 읽고 쓰는 잠시 동안만은 그 의식을 괄호에 묶어 모르는 척한다. (여담이지만, 그 비루함과 헐벗음을 직시하고 자신을 스스로 비웃는 탐정소설 장르 내 하위 장르가 하드보일드 장르라고 생각한다. 어느 장르든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이런 '팀킬' 장르가 하위에 생기는 듯.) 슈퍼히어로물 보면서 "세상에 슈퍼파워 따위가 어딨어?" 따지지 않듯이. 그 부분 자인 단계를 얼버무린 채 건너뛰면, 어느 순간 리얼리즘 장르 소설이 정말로 리얼하다고 믿어버려 리얼리즘 장르 소설을 통해 인생을 배우겠다느니 사회에 공헌하겠다느니 인간을 탐구하겠다느니 말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SF는 과학이 아니다, SF는 과학적이지 않다, SF는 과학하는 데는 쓸모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단계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SF는 과학이다."는 로망이 현실에 자리잡을 여지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실전성 따윈 없음을 자인한 후에야 비로소 현대 사회에서 실전 격투기가 있을(가르치고 배울.) 자리가 생기듯. 그럼 예전엔 다만 부가물에 불가했던 심신단련이라든지, 자아완성, 예법 교육, 취미 활동 같은 격투기의 다른 측면이(실전파들은 거짓,환상,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오히려 주의 자리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 SF 속에서 논하고 궁구하고 내다보는 소위 '과학'들은 아무리 엄밀하고 논리정연해보여도 결국엔 증명되지 않은 사이비 과학일 뿐이다. 난 할 클레멘트나 그렉 이건을 꽤 좋아하지만 이 사람들이 과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둘 다 동의할 듯. 물론 난 그와 동시에, 로망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현실과 로망의 경계를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SF는 과학이야!"라고 주장하는 작가들이 쓴 SF를 꽤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 광기는 자기 작품에 쏟는 자원 투입량을 비합리적으로 높이는 경향을 가져오니까. 어쩌면 장르의 신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광신도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져다 바쳐야 겨우 아주 작은 것이나마 내주는 인색한 신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미친 작가들(그리고 그들의 작업물)을 좋아하는 것과 그 광신은 거짓이라고 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양립가능하다. 4. 책들. 1번에 예외가 단 하나 있었는데, 책이었다. 그래서 이 번엔 한 번 예외를 깨보기 위해서(혹시 안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못 버리는 것 아닐까 싶어서.), 대량의 안 보는 책들을 서재에서 덜어내서 처분했다. (120권 정도.) 흠, 버리니 좋구나. 앞으로는 책들도 재깍재깍 내다버려야지. (남에게 팔긴 싫다.) 5. 믹서. 예전에 어느 영화에선가 스텔론이 자신의 보물(재산) 1호로 믹서를 꼽는 장면이 있다. 운동 한창 열심히 할 땐 적극 공감했던 장면이었다. ㅋㅋㅋ. 굳이 표현하자면, 믹서가 내 외장형 소화기관처럼 느껴졌달까. 옛 추억에 젖어 구석에 처박힌 믹서를 다시 부엌 가운데로 끄집어냈음. 물론 운동하겠다는 결심 따윈 하지 않았다.ㅋㅋ. 6. 휴대전화 난 엑스페리아 레이(검은 색)를 쓰는데, 남들이 여성용 폰이라고 놀린다. 얇고 네모반듯 넙데데하고... 지들 것과 생긴 것 완전 똑같구만 -_- 최근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휴대전화 계급도라는 것을 봤는데, 여기서도 엑스페리아 레이는 혼자 여성형 의인화 버전.-_- 이런 상투적인 소지품 야유따위에 마음이 흔들리다니, 내 남성성에 대한 확신은 아직 내 로망만큼 강고하진 못한 듯.
1. 모니터
새해 첫 지름은 30인치 모니터로 정했다. 이전 모니터들과 함께 나란히 3대를 펼쳐놓으니 장관이로구나. 하지만 이젠 책상 길이가 부족하네.;; 모니터 3대가 들어가는 긴(최소 2.2m, 넉넉하겐 2.7m쯤이면 될 듯하다. 거의 없다.) 책상을 하나 살까, 모니터 1대를 힌지암으로 공중으로 뺄까(비싸다. 고작 암 하나가 20만원 전후. 뭐 이리 비싸.-_-), 아니면 그냥 24인치 모니터 1대 방출할까(하지만 난 누가 내가 쓰던 물건 쓰는 것 싫어한다.) 고민중. 2. 1번. 아마 마지막 해법을 택할 듯. 모니터 3대용으로 그래픽 카드 두 장 쓰는 것도 부담스럽다.(전기료, 케이스 내부 온도.) 무엇보다 내겐 모니터 3대 동시에 쓸 일 거의 없다. 3. 바다 바다 보고 옴. 옛 사람은 의구한데 옛 바다는 간 곳 없군. 서글프다. 4.캐드 '엔드게임' 우연히 시청 시작. 캐나다판 '멘탈리스트'라고 하던데 멘탈리스트를 안 봐서 비교는 불가능하다. 처음엔 지루한데 참고 보니 꽤 볼 만 하네. 영화판 셜록 홈즈처럼 주인공의 뇌내 시뮬레이션을 영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 재미있다. 얜 (미래의)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추리를 하기위해서 그러지만. 당연히 주인공의 단순한 망상과 넘겨짚기, 섣부른 인간심리 일반화, 감의 산물일 뿐이지만, 드라마인지라 이게 빗나가는 법이 없다. -_- 아직 10편 남짓 밖에 안 나왔지만 시간 날 때마다 가끔 한 편씩 보는지라 딱히 안달 나지도 않는다. 5. 영화 '머니볼' 보기야 예전에 봤지만 지금 생각난 김에. '개미'를 위한 워렌 버핏식 '가치투자' 이야기네. -_- "시장에서 '적정가' 이하로 저평가된 우량주를 사들여 장기투자해라."는. 하지만 이미 몇 세기 전에 로우는 "주식시장에 '적정가'는 존재치 않는다. 오직 매가와 호가만 있을 뿐이다"고 말했지.ㅋ. 농담이다. 음, 이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라면, 아마 버핏 쪽에 더 가깝겠지만, 로우도 좋은 지적을 했다고 생각한다. 시장에서의 가격은 계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과 공포 등 감정, 경험칙에 따른 서로 다른 감, 가치관, 신념, 기대, 동물적 본능(;;)... 같은 것들도 시장에서 주가를 결정짓는 중대요소 중 하나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만일 모두가 동일한 적정가를 산출해고 그 가치를 똑같이 신봉한다면 아무도 주식 거래를 안 할 것이다.해당 주의 가치를 서로 달리 생각하니까 (거래를 통해 서로 자기가 더 큰 득을 본다고 믿고) 거래를 하지. 사람들은 머니볼(이 영화말고 실제)을, '인간이 없는' 스포츠를, 숫자놀음을 싫어할 것 같다.(이건 내가 야구를 안 좋아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야구가 원래 통계에 특화된 종목이긴 해도. 가만 보면 사람들은 종종 부진한 성적만 내는 팀에도 팬으로 남아 있던데. 이는 꼭 지역연고제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음.) 내가 보기엔, 설령 머니볼이 월드시리즈 10연속 우승을 한다고 해도 대개의 사람들은 여전히 머니볼을 싫어할 것이고, 선수의 얼굴도 보지 않고 숫자만으로 선수를 사들이고 방출하는 주인공의 트레이드 방식을 비인간적이라고 증오할 것 같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팬들이 싫어하는 방식이 아무리 성공적인 성적을 내도 주류가 될 수 있을까? 음, 대부분의 야구팬들이 야구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은 통계나 숫자가 아니라 감정이입을 할 인간의 얼굴을 한 드라마일 것 같은데. (모른다.추측. 통계놀이 자체를 더 좋아하는 야구팬도 있겠지.) 실패를 하고 다시 일어나고 실수하고 개선해나가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웃고 우는. 바로 그래서 이 영화도 역으로 주인공(다른 영화에서였더라면 전형적인 실패한 악역으로 나올 법한 인물이다.이 영화처럼 비주류가 아니라 되려 적대적 주류의 입장에서 서고.)의 감정선 연출에 전력집중하는 것 같고. 흥행 실패하긴 싫으니까. 그래서 줄곧 심드렁하게 봤는데, 맨 마지막에 아직 증명에 실패하지도 않은 머니볼 실험을 놓고 부정적(부당한?) 언론보도(실제로 이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만한 성적을 냈으니 대부분 못 그랬을 것 같은데. 일부는 그랬을지도 모르지.-_-;;;)를 띄우는 것을 보고 감독의 역연출 방식에 급호감을 느꼈다. 세련되진 않지만(직설적 외삽.) 영리하네. 덧.5번 마지막 부분은, 난 머니볼(영화말고 실제 트레이딩 기법)에 호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무리 인터뷰에서 자화자찬 긍정적 멘트 땄다면 반감 느꼈을 듯하다는 소리.
0. 그럭저럭 볼 만은 했다. 대체로 돈 아깝다.
1. 1과 달리 2에선 마음에 드는 작품은 고사하고 인상적인 작품조차 드물다. 오탈자나 부적절한 조사 등 역자의 작문 실수도 1보다 더 많음. 이 밑으로는 책과 별 상관 없는 잡설이다. 읽으며 딴 생각만 한 탓. 2. 난 종말 이후 소설 장르 좋아하는데, 그 장르 속 세계들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잘 안 생긴다. 너무 비슷비슷해서. 소설들 스스로도 (종말은 기정사실로 만들어 독자의 시야에서 치워놓은 후) 종말 이후 세계 속에서의 인간의 삶만 개연성있게 제시하는데 전력집중하고. 종말 자체는 소외당하는 종말 이후 소설.ㅋㅋ. (비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게 해당 장르의 왕도라고 생각한다.) 3. 하지만 세계가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세계다. 소설 속 종말 이후 세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쓰기 귀찮은데, 종말 이후 세계가 천편일률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이고 부정적이고 암울한 것은 그 세계 자체가 그래서가 아니라(종말 이후 세계는 반드시 어둡게 그려야 한다는 해당 장르 규칙은 내가 아는 한 없다.) 그게 이 작가들의 한계 같다는 소리. 그 세계에 대한 이들의 반응이 천편일률적으로 어두운 거다. 4. 3번. 아니, 뭔 소리냐. 종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소리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소리처럼 생명체로서의 본능 어딘가가 고장난 소리 아닌가? 동의한다. 생명체로서는 병든 소리지.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종말 그 자체가 아니라 종말 이후의 세계다. 둘은 엄연히 다르지. 아포칼립스물이 아니라,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다. 자신의 죽음 이후 세계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보존본능으로도 설명가능하다. (연장선상이겠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종 전체의 생존이나 자신의 후손 번식에 도움이 된다든지.) 사실, 후자를 성숙한 사고 방식이라고 종종 긍정적으로 말하던데. 인류를 위해 자기희생하는 사람이라든지, 자연수명이 다 했을 때 자신이 죽고난 뒷자리를 준비(유산 상속 정리라든지.)하는 노인이라든지. 그럼 그걸 종 차원으로 확대시켜 종으로서의 수명이 얼마 안 남은 인류가(예: 불임으로 인한 인류멸망.) 인류가 사라진 이후의 지구를 준비하며(자기 뒤의 종들에 대한 선물로 인류 멸종 후에야 지구로 충돌 예정인 혜성을 미리 제거해준다든지.) 천천히 멸종해가는 종말 이후 세계물 같은 것 쓸 수 있잖아. 아름답고 따스하구나. 게다가 인간이 사라진 세계가 이전보다 더 인간적인 세계라면 인간 소외를 역설적으로 강하게 전달하는 데도 유효하다.ㅋㅋㅋ. 5. 4번은 삐딱한 반응이다. 인정. 왜 그렇게 반응했냐면( 6. 고등학교 때 읽은 성문종합영어 지문 중 하나가 기억이 나는데, 대충 요약하면 종말에는 묘한 즐거움이 내재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순간에 우주의 먼지로 화해 사라지고 그 뒤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상상에는 어떤 즐거움이 분명히 존재한다."였나.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에도 읽으면서 고등학생용 교재에 실린 지문이 뭐 이러냐 느끼는 바람에 아직도 기억한다. 동의한다. 동전의 다른 면(종말의 밝은 면.)도 같이 다루는 종말 이후 소설이 읽고 싶다. 7. 6번.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도 언제나 누군가의 종말 이후 세계다. 근데 다른 누군가에겐 언제나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잖소. 개인적 차원의 종말(생명체로서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 성적....죽음. 많이 있겠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들에겐 크로마뇽인들이 사는 지금 이 세계가 곧 자신들의 종말 이후의 세계일 것이다. 카르타고인들에겐 '로마에 의한 평화'가 자신들의 종말 이후 세계, 파국의 현세화 구현 그 자체이듯이. 근데 크로마뇽인들의 후손이나 로마인들의 후손 중 누군가에겐 밝은 세계잖소. 8. 4,6,7번 관련. 출처는 기억이 안 나는데, "희망은 불공평하지만 절망은 공평하다."는 말이 있다. 아니, "삶은 불공평하지만 죽음은 공평하다."였던가? 내가 보기엔, 사람들은 종말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개인적 종말 이후에도 세계는 계속 존재할 수 있고, 심지어 그 이후 세계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불공평(그 사람 개인이 생각하기엔. 난 여기에 동의치 않지만.)을 종말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 같던데. 내가 냉소적인 건가.;; 하지만 질문을 바꿔 물으면 대답들은 대개 달라진다. 그러니까 그냥 종말 이후 세계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한꺼번에 소멸해버린다면?"이라고 바꿔 물으면 "그런 종말은 별로 두렵지 않다.", 심지어 "환영한다."고 답하는 사람들 은근히 많이 봤다. 인간의 죽음 충동은 고전적 소설계 내에선 대개 공리 마냥 인정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걸 확대한 긍적적 종말 소설은 존재할 수 없을까? 가능하다. 물론 주인공이 지구 멸망을 맞아 사과나무나 심고 있는 소설은 인기가 없겠지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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